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1
1강 : 아랍교회의 현황(전통교회와 복음주의 교회)
전통교회란 무엇인가?
전통교회란 말은 일반적으로 교회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근원으로 간주하는 예전적인 교회(Ritualistic)를 말하고, 에반젤리칼 교회는 성경을 영적 권위를 갖는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래서 전통(Traditional) 교회는 레바논의 경우, 그리스 정교회, 마론파 교회, 그리스 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앗시리아1)야곱 교회, 네스토리아 교회, 콥트교회, 라틴 로마 카톨릭 교회 등 개혁주의를 따르지 않는 교회들을 일컫는다. 전통교회의 특징은 성경의 권위를 다른 것 다음으로 존숭하고 교인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요르단에는 전통교회라는 이름하에 정교회, 라틴(서구식)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앗시리아 정교회, 앗시리아 카톨릭교회, 아랍복음주의 성공회, 콥트 정교회, 콥트 카톨릭 교회, 루터 복음주의 교회, 마론 교회, 칼다니야 교회, 아슈르 교회 등이 있다. 사실 성공회와 루터교회가 복음주의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도 에반젤리칼 교회 그룹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아리송하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선교는 기존의 전통교회가 있는 지역에서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통 아랍교회가 있는 지역(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이라크)보다는 이들 전통교회가 없는 국가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선교가 활발하고 또, 열매도 맺고 있다. 중동 선교의 정책은 하나는 과거 서구 선교사들이 했던 것처럼 정교회 사람과 카톨릭 사람을 정교회와 카톨릭 밖으로 끄집어 내어 에반젤리컬 교회를 세우는 일과 또 다른 하나는 정교회와 카톨릭 속으로 들어가 정교회와 카톨릭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전자는 오늘날 중동지역 일부 국가에 에반젤리칼(복음주의) 교회가 있어 선교사들이 아랍교회와 동역하는 사역을 펼치고, 후자에서는 복음을 들고 동방정교회(야곱, 아르멘, 네스토리아, 콥트, 마론)와 카톨릭 속으로 들어가 사역을 하는 것이다. 다음의 교회들은 모두 19세기 중동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고 MECC(중동교회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
1) 이스턴정교회(칼케돈의 결정을 수용한 교회)
2) 오리엔트 정교회(칼케돈의 결정을 수용하지 못한 교회) -콥트 아르메니아 야곱교회
3) 이스턴 가톨릭(동방식 예전을 가진 카톨릭)-마론가톨릭,라틴 가톨릭, 콥트 가톨릭, 앗시리아 가톨릭, 아르메니아 가톨릭, 말키 가톨릭
4) 프로테스탄트 : 루터 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교회
20세기에 서양선교사들이 중동에 와서 세운 교회 즉 침례교회, 나사렛 교회, 하나님의 교회, 기독교 연합교회, 형제교회, 복음주의 자유교회 등은 MECC에 가입되어 있지 않고 중동신학교육협의회(MEATE)에 가입되어 있다.
1) 앗시리아는 아슈르라고 하고 시리아는 현재의 시리아 국가 지역을 말한다.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북부를 말하고 그 남부는 바벨론 국가이다. 앗시리아의 수도는 아슈르- 칼라calah-니느웨 순으로 수도를 옮겨갔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2
2강: 요르단의 아랍교회
중동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정교회가 72%, 가톨릭이 20% 그리고 개신교가 8%에 해당된다. 전통교회와 복음주의 교인들을 합쳐 총 2200만 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요르단에서는 전통 교회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교회 이름이 언급되었다. 정교회, 라틴교회, 롬카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카톨릭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앗시리아 정교회, 앗시리아 카톨릭교회, 아랍복음주의 성공회, 콥트 정교회, 콥트 카톨릭교회, 루터 복음주의 교회, 마론교회, 칼다니야 교회, 아슈르교회 등이다. 결국 그들이 보는 ‘교회’에는 복음주의자들이 사역하는 개신 교회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 아랍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타국 이주는 중동 땅에 기독교인들이 줄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개신교 교회는 전통교회 즉 로마카톨릭과 정교회의 공격을 계속 받고 있다. 중동의 언론과 사회는 기독교인들을 구석진 모퉁이로 몰아 가고 있다. 그 결과 소수 민족으로서 굴욕을 당하고 적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사회에서 지도력을 잃어 버렸다. 이라크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르단을 거쳐 서구와 유럽으로 떠났다.
요르단에는 25만명의 기독교인이 산다. 요르단 정교회 기독교인들은 “종교는 전능자를 위하여 존재하고 국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아랍인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생활에서 요르단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차별은 없다고 하나 정부 부처의 고위직은 무슬림들이 주로 차지하고 금융, 재정, 회계 부문은 믿을만한(무슬림들이 그렇게 생각함) 기독교인들을 그 자리에 앉힌다.
흔히들 요르단에서 개신교 교회의 최대의 적은 무슬림이 아니고 정교회일 때가 많다고 한다. 개신교 교회의 확장을 막으려고 정교회가 모든 허위 사실을 꾸며 정부에 소송을 내면 이를 기화로 이슬람은 개신교 교회의 발목을 붙잡는 수법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적은 기독교 교회 안에 다양한 교파들간의 반목과 질시가 큰 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경향이 오늘날 요르단 교회 안에도 있다.
오늘 요르단에는 무슬림이 95%, 정교회와 카톨릭이 4.7% 그리고 복음주의 교인이 0.3%(0.5%)에 이르고 있다. 교회와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정교회와 카톨릭에 초점을 두고 사역을 하여 왔다. 그러나 95%에 해당되는 무슬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히되어 왔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왔다. 그것은 개인적인 신분의 안전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무슬림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거라는 속임이 선교사와 교인들 안에 있었던 것이다.
요르단의 아랍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여타 기독교 세계와 아랍교회간에 긴밀한 관계가 없고, 신학적 고립으로 건전한 상장보다는 이단들이 침투하기 쉬웠고, 완전한 구원의 복음을 교회가 포기한 것이라고 나비히 압바시 목사는 말한다. 여기에 아랍교인들이 서구로 이주하고 있고(이라크와 레바논)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요르단, 팔레스타인) 한 국가 내에서도 여러 복음주의 교단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레바논과 시리아). 무슬림들을 복음화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첫째 아랍기독교인들이 “크리스챤”의 모델로 살아가지 못한 점과 무슬림이 개종하는데 사회적, 신학적 장애가 있고 사탄이 영적으로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랍 국가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1. 복음주의 교회-복음을 전할 영적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제자를 양육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엡 4:11-12). 요르단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율법적이다.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2. 정교회와 카톨릭 교인-이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보다 훨씬 접근하기 쉽다. 물론 이들도 복음전도의 대상이다.
3. 무슬림-무슬림들을 접근하는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들이다(롬 10:14-15).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무슬림들을 교회로 초청하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버리게 하였다. 그동안 95%의 무슬림들을 소수의 사람들이 다니는 복음주의 교회로 초청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교회 건물로 들어오게 하기보다는 무슬림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소그룹(small group)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다.
현재 요르단에는 루터 교회 3개, 성공회(우쓰꾸피야) 6개, 하나님의 성회(캄씨니야) 7개(자발 웹다,무즈다르,마르카, 자르카, 마다바, 이르비드, 푸헤이스), 기독교연합교회(암만, 마다바 2, 마하따, 마프라끄, 여두다, 스마키아, 나오르, 마르지 하맘, 7서클) 9개, 나사렛교회(자발 암만, 마다바, 마프라끄, 이르비드, 아쉬라피야, 스웨이피야, 카락, 자르카, 자발 따리끄, 자르카 자디다) 9개, 침례교회(아즐룬, 암만, 자르까, 이르비드, 제라쉬, 안자라, 호슨, 웹다, 아분세르, 다히야트 라쉬드,서암만, 쉬미사니,스웨일레, 푸헤이스, 자르카 자디다, 하쉬미야, 라흐마) 16개, 복음주의 자유교회(자발 후세인, 아쉬라피야, 마하따, 마르카, 하쉬미, 자발 암만, 옴무 우데이나, 자르카, 나깝, 쌀뜨, 아까바) 11개 등이다. 그리고 이라크 모임이 7개, 이집트인 모임이 4곳과 한인교회와 인터네셔널 교회 그리고 수단교회와 필리핀, 이티오피아 모임이 있다.
우선 위 5개의 복음주의 교단(침례, 나사렛, 기독교연합교회, 하나님의 성회, 자유 복음 교단)이 있는데 그 중에서 침례교회가 단연 우세한 상황이다.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는 이들 다섯 교단이 연합하여 1995년에 문화부의 허가로 세워졌다. 신학교 설립당시 초교파로 출발하여, 교단별 총회가 없는 요르단에서 총회의 역할을 신학교가 담당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2002년 주로 침례교 출신의 교수들이 가르치면서 초교파가 퇴색되고 특히 미국 침례교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함에 따라 달라스 신학교의 신학노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두곳의 신학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은바 있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3
3강 이라크의 아랍교회
이라크는 ‘민족 프로테스탄트 에반젤리칼 교단(1855년 창립,500명) ’이라는 이름 하에 이라크 장로교회가 들어 있어 요르단, 레바논과 용어상 구별이 다르다. 다시말해서 이라크에는 아슈르 에반젤리칼 프로테스탄트 교단(1855년 창립, 100명), 어드벤티스트 삽티인 교단(1923년 창립, 152명) 그리고 성공회(1882년 창립, 300명), 하나님의 성회(1965년 창립, 30명), 형제교회, 아르빌의 복음주의교회, 영적 아르메니아 형제교회(1930년 창립, 50명) 등이 프로테스탄트- 에반젤리칼이라는 이름 하에 놓여있다. 지난 5년여 이라크 사람들이 요르단으로 많이 이주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구라파와 호주 캐나다 등 여러 국가로 흩어져갔다. 그들이 이주한 곳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기도 하지만 대부분 문화 충격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1993-2000년까지 이라크인 신학생들이 요르단에서 42명이 공부하였건만 아직 한사람도 조국 이라크로 돌아간 사람은 없다. 물론 키르쿠크에서 아버지를 이어 목회를 대물림한 장로는 요르단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 목사안수를 받고 현재 사역하고 있어, 지난 5년간 고국으로 돌아간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단의 학생 대부분과 모로코와 예멘의 학생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어느 이라크인의 말이다.
현재 이라크는 사역자가 모자란다. 어느 사역자라도 오겠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특히 이라크 사람이 돌아와서 사역하겠다고 하면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런데 만일 이라크인들이 이라크로 돌아와 기존 교회에서 사역을 하기를 원하면 첫째는 기존의 질서를 존중하여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집을 초대 받으면 그 집의 주인을 존중하듯이 어떤 신학을 공부하였더라도 일단 이라크로 돌아오면 이라크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해 주어야 하고, 두 번째는 어떤 교단의 신학을 해외에서 공부하였더라도 일단 이라크로 돌아오면 이라크에 있는 기존의 신학 교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이라크는 5개 복음주의교회(바그다드의 아슈르 교회, 아랍교회, 모술교회, 키르쿠크 교회, 바쓰라 교회)는 모두 장로교회로서 개혁신학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 교회 안에는 이라크 정부가 보낸 정보부원이 있다고 말한다. 아랍 무슬림들은 개신교 교회의 교인들을 시온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설교는 삼가해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이라크는 <반시온주의 > <반미제국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미국의 일부 기독교 교회지도자나 신학자 중에는 미국이 잘사는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이 유대인들과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아랍인들 앞에서 서슴지 않게 말한다.
2000년 제5차 이라크 기독인 지도자 대회에 한국인 28명이 참가하였다. 이라크 기독인 대회 전체 참가자는 제3회는 90여명, 제4회는 350여명, 제5회는 300여명이 참가하였다. 첫 3일간 주제는 유엔의 경제 제재를 해제하도록 촉구하는 내용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시온주의자와 식민주의와 연계하여 성토하는 대회이었다. 나머지 3일간은 모술과 우르, 바벨론 등을 방문하였다. ‘이라크 앗시리아 정교회의 몇 몇 지도자들이 복음주의 개신교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더라’.이라크의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인 ‘칼다니아 카톨릭’의 한 주교는 ‘우리들로만으로 족한데 왜 개신교가 이라크 땅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짜증난 목소리를 냈다.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에는 기독교인들이 도라, 비타윈, 바그다드 자디드, 니으리야, 왜게이야라, 게라쥐 아마나 등지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이라크 개신교와 소수 종파의 책임자는 사미 일리야스 국장이고 복음주의 기독교 협회장(라이스 마즈마아 알카나이스 알인질리야)은 고르기스 호르무즈 사다 집사이다. 그리고 개신교와 카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하여 총대표는 칼다니야 총대주교1)루파일 아우왈 비다위드이다.
고대 동방 교회(카니사 샤르끼야 까디이마, 총대주교는 앗데 사니)는 아슈리야 교단(Patriarchate Palace of the Ancient Church of the East , P.O.Box 2363, Tel. 7198362 Fax. 7179752, Baghdad-Iraq)을 가리키고 바그다드에는 복음주의 교회가 둘인데 하나는 복음주의 장로교회(이크람, 이집트인 목사)와 아수리야 장로교회(나쉬완 목사,이라크인)가 있다. 그런데 아수리야 교회 간판에 왜 ‘아슈르(Ashur)’라는 단어를 안 쓰고 ‘아수르(Athur)’라고 썼느냐 했더니 아슈르라는 말은 ‘민족’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라크 정부가 이런 조그마한 개신교 교회가 그 민족의 이름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아, 정부가 못쓰게 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2001년 초 모술에는 아딜 카밀 목사와 18여명의 교인이 있고 바쓰라에는 길버트 목사, 키르쿠크에는 하이삼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현재 바쓰라교회와 키르쿠크 교회가 상대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교회와 카톨릭의 교인들 중에서 이들 복음주의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가는 교인(무타랏디드)들도 있다.
이라크 종교성 장관은 압둘 무님 아흐마드 쌀리흐이고 무슬림이다. 종교성2)은 이슬람과 기독교(개신교; 카톨릭-칼다니야, 정교회-네스토리우스, 아슈리, 시리야니3), 아르멘; 라틴-도미니카 ), 야지디야교, 싸비아 만다이아교(세례요한의 세례를 지키지만 기독교도 이슬람이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하였다) 그리고 어드벤티스트 삽티야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이라크 모술에만 10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사는데 카톨릭이 전체 기독교의 75%, 정교회가 20% 그리고 아슈리(네스토리우스) 교회가 5%를 차지하고 장로교인은 소수이다.
이라크 민족으로는 아랍인, 쿠르드인, 아슈르인 등이 살고 특히 북부에는 아랍인보다는 아슈르인들이 많이 사는 지방도 있으나 실제 정부 통계에는 아슈르인이라고 쓰기보다는 아랍인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이라크인들이 귀뜸한다. 그러나 이라크 사람들이 요르단에 많이 나와 있는데 2000년 이라크 정부는 해외로 나간 이라크 국민들에게 형벌 감형을 허락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라크 종교성에서는 ‘이라크에는 장로교 이외에 타교단은 입국을 절대 불허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라크 장로교를 돕는 미국 장로 교회와 여러 교회들이 있으므로 서로 협력하여 중복투자 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종교성의 허락을 받은 목회자만이 장로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장로교회는 심방을 할 수 있지만 가족들을 한 가정에서 모이기는 어렵고 다만, 기독교 가정들이 교회 내에서 모이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이라크 정부는 각교회에 부활절과 성탄절에 선물을 보내준다고 한다.
현재 바그다드 아랍인 장로교회는 시무 장로가 세분이다. 바그다드 장로교회는 500여명이 나오고 모술 장로교회에는 25가정, 키르쿠크 장로교회에는 100가정, 바쓰라 장로교회에는 100가정, 바그다그 아슈르인 예배에는 35가정이 2001년 현재 등록되어 있다. 바그다드 아랍인 장로교회에는 주일 저녁 400여명, 금요일 아침 예배에 50여명, 토요일 기도모임에 40여명, 목요일 저녁 청년들이 70여명이 나온다고 교회측이 말한다.
바그다드 아슈르 복음주의교회는 예배시에 아슈르어를 아랍어 글자로 표기한 찬송을 부르는 데 할머니들은 아랍어를 잘 모르는 것 같고 나쉬완목사(이라크인으로 레바논의 만쑤리야 침례신학교를 졸업함)는 아랍어로 설교하였다. 교인들이 사도신경은 아슈르어로 암송하였다. 이라크의 교회는 카톨릭(룸), 칼다니야, 시리야니야 , 아르메니야, 그리스 정교회, 아싸비야,
앗시리아(Assyrian) 교회의 역사는 복잡하다. 3세기에 까스딴띠야(이스탄불) 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뉘게 된다. 가스딴띠야를 따르는 교회를 말키(Melkite)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말리키학파는 발음이ma:likiyya(마알리키)이므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말키 교회는 4세기에 시작되어 현재 200만의 신도가 미국에 살고 시리아에는 40만, 레바논에는 50만-75만이 산다. 이때 네스토리우스는 이라크 유프라테스 근방으로 와서 그의 교리를 전한다. 그 이후 이라크는 전체가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나사띠라)이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대주교(바따리카batrik)가 로마를 따르고, 자원해서 로마에 순종하면서 그가 로마그룹을 이루었는데 그들이 칼다니야이다. 그리고 이라크에 남은 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나싸띠라)로 이어졌다.
영국인들이 와서 이들을 아슈리인('ashuuriin)이라 불렀고 이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서구 역사를 따라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정한 사람들과 동양의 역사를 따라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한 사람들로 나뉘었다. 후자는 이라크에 대교구가 있고 그 수효는 적으며 전자가 후자보다 상대적으로 많아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호주 등에 많이 산다. 지금 이란과 미국, 호주에 사는 이라크인들은 칼다니야 교인들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세의 한동안 신자들이 많아 중국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쳤으나 근래에는 무슬림으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아 20세기에는 신자가 격감하였고 많은 생존자들이 서구로 이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이프러스로 일단 이주했다가 시카고에 정착하였다. 현재 10만명에 달하는 이들 기독교 신자들은 이란, 이라크,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단으로 불린다. 사역의 비전이 분명하고 직업이 분명한 한국의 전문인 사역자를 필요로 한다.
1) 이라크에는 바바(교황)-카르디날(추기경)-페트리아크(총대주교)-무뜨란-라이스 카흐나-카힌, 쿠리khuri-(샴마스-복음주의 교회 집사)-쉬드야크-까리, 무랏틸의 순서로 내려온다. 그리고 이들 이름 앞에 호칭이 붙는데, 가령, 까다아사 바바, 니야아파 카르디날, 갑따 파트리아크, 하드라 카힌, 씨야다 오스꼬프 등이다.
2) 이라크 종교성을 통해 이라크에 입국하려는 사람은 이름, 직책, 주소와 여권사본(사진이 있는 부분)을 최소한 입국 날짜 2달 전에 종교성으로 보내면 종교성에서 비자를 발급하여 준다고 종교성 책임자는 말한다.
3) 아람어는 시리야니 방언과 아슈리 방언 둘로 나뉜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4
4강: 시리아의 아랍교회
시리아는 정교회가 대부분이고 카톨릭, 오순절교회, 장로교회(다메섹, 힘스, 라다끼야, 할랍, 할랍 옆 교회, 하싸까, 이라크 국경) 침례교회(다메섹, 힘스, 라디키야), 나사렛교회(다메섹, 라디키야, 할렙),기독교연합교회 등이 있다. 시리아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교회는 역시 장로교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로교회가 영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주 적은 수가 영적 그리스도인인데 그들이 시리아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시리아 장로교회는 성공회(우스꼬피야)와 비슷하다. 전체 그리스도인 중에서 단지 2% 정도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무으민 하끼끼)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침체된 이곳에 가서 사역할 분들이 필요하다. 영적인 상호 관계(타까룹)가 없기 때문에 교파간 서로 협력이 잘 안된다. 저녁모임을 갖는 나사렛 교회와 장로교가 전혀 관계를 열지 못하고 있다.
요르단에는 교회간의 유대( 타하푸자트)가 있으나 시리아에는 서로 왕래가 없다. 장로교 목사는 나사렛 교회와 연합하여 일하지 못하는데 일종의 시기심(ghayrah)의 소산인듯하다. 특히 나사렛과 기독교연합교회의 목사들은 장로교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다들 큰 차이가 없다.
장로교 교단의 총회(마즈마아 아알라)는 시리아와 레바논이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레바논이 오늘날과 같이 형편없이 분열되기 전에는 레바논이 이곳 비옥한 초생달지역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나사렛 교단은 2002년 12월 25일부터 팔레스타인,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의 나사렛 교단 소속 목회자들이 모여 총회를 연다. 여기서 3일간 회의를 갖고 교회와 교단 자체의 문제들을 논의한다. 2002년 10월 중동신학교육협의회(MEATE) 모임을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가졌다.
시리아의 그리스도인은 250만인데 거의 명목상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마씨히 이쓰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무으민)은 3000명 정도이고 그 중 장로교인은 2만명 정도이다. 수도 다메섹에는 장로교회가 가장 크다. 그래서 시리아에는 할 일이 많다. 시리아는 팀으로 사역하여 여러 그룹들이 필요하다. 할렙, 다메섹, 해안가(싸힐), 내륙할 곳 없이 일할 곳이 많다.
다른 아랍 지역처럼 시리아에도 그 지역에서 익히 알려진 사람이 중개(와씨이뜨)가 되어 그 지역 교회에서 선교사를 소개하고 사역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장로교회가 선교사를 받아들일만한지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교회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영적으로 갈급해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수고(마즈후우드 카비르)가 필요하다. 교회 밖에서 일하는 것은 정부와 교회로부터 보호 받기가 어렵다. 교회 이름으로 일할 때 교회가 보호막이 되어준다. 정부가 물으면 교회가 이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점차적으로 해야 한다. 한술에 배부를 리가 없다. 그것도 계획을 가지고 기도하며 한가지 한가지 해 나가는데 역시 가장 시급한 것은 사역자(쿳담)이다.
이집트의 장로교 출신 목사가 알레포와 라타끼아에서 사역하는데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성경 책과 전도용 필름, 자동차, 여름 컨퍼런스 비용 등이 필요하다. 레바논에는 현재 여름 수련회가 있으나 시리아에는 여름 수련회 사역이 적다. 두 번째는 사역자가 전임사역자이어야 한다. 현재처럼 아랍 사역자들이 주중에는 세상 일하고, 주말에 혹은 주일에 사역하는 아랍 중동의 상황은 많은 사역을 하기에는 역부족하다.
시리아에는 이슬람국가로서 이슬람의 알라위파(알라위인-알리까지만 믿고 순니파에서는 이단이라고 한다. 그들만의 성서가 있는데 쉐이크만 이 성서를 가지고 있고 금식을 안한다), 드루즈파, 시아파(알리의 아들 하산과 후세인까지 믿는다), 순니파 이슬람이 있다. 레바논의 기독교가 시아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는데 레바논 전쟁 이후 시아-기독교인 간의 싸움으로 시아는 광적(타앗쑵)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할 일이 많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교회학교 학생이 전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그들을 주의 집으로 인도할 수 있는데 교회가 살아 있지 못하니 그것도 우리의 기도제목이다.
시리아도 다른 아랍 지역처럼 직접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들이 이웃으로 살게 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성문제와 알코올 문제로 영적 생활이 어렵게 되어 있다. 지금도 무슬림은 아랍어 기독교 방송을 듣고 교회를 찾는다. 예수를 더 알고 싶어서 그리고 그들이 먼저 질문해 온다. 아랍의 기독교는 천천히 성장한다. 또 시리아에서 학생들을 선정하여 신학교육을 시키는 방안도 있다. 우리의 해야할 역할이 뭣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어디서 시작할까, 누구를 만날까 그리고 어떻게 동역할까를 기도해 보아야 하고 시리아의 상황을 철저히 연구하고 큰 비전(루으야 카비라)을 가져야 한다.
시리아에는 아랍어를 배우기 위한 좋은 대학들이 있다. 요르단에서 대학에 못 들어가는 요르단학생들이 유학을 하고 있다. 학비가 싸고 공부하기에 좋은 여건이라고 할 수있다. 유학생 신분으로 들어가는 방안이 있다. 그리고 시리아 교회를 좀더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르단에 거주하며 시리아 시골교회에 가서 복음도 전하고 돌아오는 사역도 필요하다. 대부분 시리아 교인들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레바논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한다. 요르단에 한두명이 와서 공부하고 있으나 시리아 장로교단은 요르단 복음주의 신학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단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곳 중동에는 교단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해당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지만 교단이 달라도 협력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시리아는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받지 않는다. 요르단에 장로교 신학 과정을 만들면 이런 시리아 젊은이들이 와서 공부하고 돌아가는 방안이 있겠다. 한국의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중동의 아랍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신학 연장 교육 프로그램(PTEE)을 요르단에서 잘하고 있다. 어찌되었든간에 아랍어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한국인 선교사가 많아야 한다.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데 영어를 잘하면 된다. 현지 통역을 세우면 된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5
5강: 레바논의 아랍교회
레바논은 땅은 작고 종교와 종파들은 다양하였다. 그러나 20여년 이상 전쟁을 치르면서 각 교단간의 대화는 줄어들고 우선 시급한 인도주의적 구제기관이 복음주의적 선교단체보다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정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분야에 적극 관심을 보였던 중동 교회협의회(MECC)는 내전을 기화로 중동지역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자 인도주의와 정치적인 노력에 우선하다보니 자연히 전도의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를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에 대화하는데 그리고 같은 기독교의 다른 교단과 대화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사회적 관심이 개인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비쳐졌다.
레바논은 1975년부터 15년간 레바논내 파당으로 그리고 레-팔레스타인, 레-시리아, 레-이스라엘간의 분쟁이 있어 왔다. 레바논은 1991년에야 기독교군대와 이슬람 군대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75년 샤브라,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 사건을 시작으로 1978년 이스라엘이 레바논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여 베이루트로 진격하고 이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갔다. 1982년 PLO 게릴라가 서부 베이루트에서 철수를 완료하였고 바쉬르 주마일 대통령은 1982년 테러를 당해 사망하였다. 그리고 나서 군대는 이슬람군대와 기독교 군대로 나뉘었고 아직도 베이루트 거리에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간의 싸움으로 얼룩진 총자국이 아직도 여러 건물에 남아 있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따이파에서 회담을 갖고 기독교 군사령관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시리아가 레바논에 들어가 잠시 국가 평정을 도운 뒤 2년 후 철수하기로 하였으나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에 들어 온 다음에 곧 프랑스 군대를 쫓아버리고 기독교 군대를 점령하였고 당시 기독교 군사령관 사미르 자으자아를 1년 뒤에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레바논의 대통령은 국가 주요 정책을 시리아 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 군대가 자국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론파 대주교가 2000년에 시리아에게 군대를 철수하여 달라고 요청한바 있다.
레바논 침례 신학대 학장 갓싼 칼라프는 레바논은 약속의 땅(아르드 알마와리드)이라고 첫마디를 꺼냈다. 레바논에는 백향목(레바논 국기에 그려진 나무)으로 유명하고 그리고 시돈과 두로가 레바논 남부에 있다. 여행 중에 위성방송 SAT-7의 사무실과 FEBA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도 매우 유익한 일이었다. 무슬림에 대한 선교는 이제 위성방송과 인터넷 방송을 통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중동의 멘탈리티는 동방 정교회, 무슬림, 유대교인, 개신교인들이 자기네 종교, 자기 가족, 자기 가문, 자기네 땅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자신의 민족, 문화, 윤리, 세계관에 막대한 손실을 준 것으로 간주한다.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는 민족의 동질성을 가지고 정치와 군사 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위임 통치 이후 줄곧, 국가의 대통령은 반드시 마론파 기독교인이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안전감을 느끼고 있었고 체면이 보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계속 받으면서 프랑스는 친프랑스 마론파 공동체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 주었다. 마론파 교회와 ‘어머니 프랑스’와 밀착된 끈은 마론파에게 자신들이 아랍인이 아니고 서구 기독교 세계의 일부라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 이것이 곧 레바논 내전의 한가지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현재 베이루트 거리는 Green line(실제 선을 그어놓은 게 아니고 돌벽으로 경계를 삼음)을 중심으로 동(기독교인)과 서(이슬람)로 나뉘어 살고 있다. 동베이루트에는 Mediterranean Bible College(MBC). Christian Alliance Institute of Theology(CAIT), Arab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ABTS)의 신학대가 있고 서 베이루트에는 Near East School of Theology(NEST) 신학대가 있다. MBC는 영어와 아랍어로 수업을 들을 수 있으나 CAIT와 ABTS는 완전히 아랍어로만 강의를 들을 수 있고 NEST는 완전히 영어로만 강의를 한다. MBC, CAIT, ABTS간에는 서로 학사 일정을 공유하며 교수들이 새 학교의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 가르치고 도서관도 서로 열람케 한다. 이들 세 신학대는 서로 협력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NEST의 교수 콜린 채프먼에게 왜 다른 신학대와 NEST가 서로 협력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MBC와 CAIT가 NEST를 복음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협력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NEST는 복음주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라고 대답하여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간의 의견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NEST는 초빙되는 교수에 따라 어느 해는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띄고, 어느해는 복음주의적인경향으로 흐른다고 리야드 목사는 말한다.
교회로는 갓싼 칼라프 침례신학대 학장의 말을 인용하면 레바논에 침례교회가 25개(1500명), 장로교회가 10개 정도(10,000명), 얼라이언스교회가 4개(300명 정도), 형제교회(Brethren)가 3개는 열린교회이고 닫힌 교회는 역시 3개정도 있는데 합쳐서 300명 정도이다. 나사렛 교회는 2개(100여명), 하나님의 교회 7개(200명 정도), 회중교회 6개(800여명), 퀘이커교도(Asdiqai1))는 1개(50명정도), 성공회는 1개(150여명), 베니어스(Karramun)들이 있고 하나님의 성회는 4개 교회(200명정도) 그리고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교회는 5개교회(1,000명)가 있다. 갓싼 칼라프는 레바논에 장로교회가 들어 온 것은 1825년이고 10년 뒤 1835년 선교사들이 레바논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1850년쯤에 시작되고 1895년 침례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레바논의 장로교회는 뜨거움이 없고 전도의 열심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리야드 목사는 반론을 낸다.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1/ ABTS(Arab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만수리야 동네의 침례 신학대, 학장: 갓싼 칼라프 Ghassan Khalaf): ABTS는 만쑤리야 언덕에 위치하여 지중해가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아랍세계와 서구가 만나는 관문에 자리하고 있다. 레바논은 언어, 문화, 민족들이 모이는 곳으로 복음주의 침례 신학대가 생긴 것은 1960년의 일이다. 미국의 남침례교 국제선교부가 시작하였으나 1993년에는 레바논의 현지인들이 중심이 되어 2000년 현재까지 500여명의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교육은 아랍어로 실시하고 아랍 세계의 필요에 상황화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2001년 현재 신학대 교사를 신축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학생들은 1993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알제리,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모로코, 수단, 시리아, 튀니지에서 온 학생들과 호주, 유럽, 북미 등에서 온 아랍인들이 입학하고 있다. 교단으로는 침례교단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자유교단, 기독교 연합 교단, 성공회, 하나님의 성회, 루터교단, 나사렛교단, 장로교단의 학생들이다.
학위과정은 신학 학위(C.Th, 1년제 30학점), 목회 훈련학위(C.T.M, 60학점), 신학디플로마(Dip. Th. 90학점), 신학학사(B.Th. 4년제 128학점)등이 있다. 학사과정의 학생이 40여명 공부하고 있고 특히 학생기숙사도 독신 아파트와 가족 아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부학장은 폴 샌더스로 미국 침례 교단의 출신이다. 침례 교단의 출판사가 있었고 도서관도 잘 준비되어 있었다.( P.O.Box 60, Mansouri도 Maten, Lebanon,전화.+961(0)4/400 250, 04/400915 , 팩스 + 961(0)4/400 250, abts@inco.com.lb)
2/ MBC(Mediterranean Bible College: 마르 미트르 옆의 church of God 신학대, 학장:존 존슨John M.Johnson): 지중해 지역의 신학교육의 관심과 필요에 부응하여 1980년 사이프러스에 모여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레바논에서 온 대표들과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선교부가 의논을 가졌다. 이 협의에 필요한 경비는 미국 하나님의 교회 여성 성도들이 모아 준 것이었다. 두 번째 모임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1982년에 모여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우고 이 모임에서 신학대 이름을 지중해 성경대학이라고 하고 이사회가 선임되었다. 대학은 레바논에 위치하기로 하고 이 지역 하나님의 교회를 굳건히 하도록 하였다. 초대 학장에는 푸아드 멜키( Fouad Melki)이었고 1984년 22명의 학생이 등록하였다. 1996년까지 31명이 졸업하였고 학생들은 하나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수단의 학생들로 나사렛교단, 하나님의 성회, 장로교회와 그리스도의 교회 등에서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2001년 현재 7년된 신학대로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현재 4회 졸업식을 냈고 목회 학위(Cert. Min, 1년제 31시간/성경과 목회), 목회 디플로마(Dp.Min, 2년제 61학점.)과 신학학사(B.Th, 4년제 123학점/목회, 교육, 타문화 강의) 학위과정이 있다. 학생 수는 2001년 봄 현재 18명이 공부하고 있고 베이루트에서 8킬로 떨어진 브살렘 지역에 신학대 부지를 마련하고 현재 신축중이다. 지중해 성경대학은 중동 신학교육 협의회(MEATE)와 유럽 복음주의 인준 협의회(EEAA)에 회원이고 레바논에 위치한 침례신학대(ABTS)와 기독교연합 신학대(CAIT)와 파트너쉽을 갖고 동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웨슬레 신학으로 나사렛교단과 유사한 교리를 갖는다고 갓싼 칼라프는 말한다. (P.O.Box 165164, Ashrafih, Beirut, Lebanon, 전화.+961(0)1-200 903, 팩스 + 961-1-321566, amelki@beirut.com)
3/ CAIT(Christian Alliance Institute of Theology: 카란티나 동네의 얼라이언스 신학대,학장: 라드완 다기르): 1889년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연합 교회가 시작되어 다음에는 브엘세바에도 모임이 이루어졌다. 성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요르단 동편으로 그리고 시리아 남부(호란)로 이어져, 시리아 아랍교회가 처음으로 1923년 초등학교와 함께, 시리아의 알수웨이다에 세워졌다. 레바논과 시리아2)의 중부와 북부를 포함하여 교회가 세워져가자 이들 교회들의 목회에 필요한 목회자들이 절대 요구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1954년에 베이루트에 성경학교가 세워졌다. 1970년대에는 신학을 위한 연장교육이 이뤄졌는데 이는 학교보다는 학생들의 손으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큰 열매가 없었다.
1980년대 말 기독교연합 교인들이 많아지고 이들 교회에서 사역할 영적인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1985년 신학분야에 최고 학위를 가진 주의 종들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1986년 베이루트에 ‘복음을 위한 기독교연합 훈련학교’가 시작되었고 1990년 레바논과 시리아의 기독교연합 교회 총회가 복음주의 신학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1992년에는 시리아 따르 뚜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복음주의 신학대’와 ‘복음을 위한 기독교연합 훈련학교’를 합치기로 하고 학교명칭을 ‘기독교 연합 신학대Christian Alliance Institute of Theology)라고 하고 본부를 베이루트에 두기로 하였다. 현재 학위과정으로는 목회학위(Cert. Min., 2년제)와 신학 디플로마(Diploma Th. 3년제) 그리고 신학학사( B.Th. 4년제) 과정이 있다. 역시 수업은 아랍어로 하고 기숙사와 도서관이 있었다. 이곳 신학대에는 나빌 쿠리 교수가 이슬람을 강의하는데 사실, 레바논에는 이슬람학 연구가 로마 카톨릭측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베이루트 성바오로 서점에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이 많았다. 성 요셉 대학(Saint Joseph University: 4년제 아랍어 과정도 있다고 함)은 이슬람 연구로 유명하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단에는 카리타스와 같은 로마카톨릭의 구제기관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 중에 신학을 더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장학금을 구하지 못하여 학업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로마카톨릭에서 일자리 창출을 하여 주어 주경야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AIT신학대 라드완 학장은 DIS(Department of Intercultural Studies)를 침례신학대와 연합하여 개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과정이 확정되면 한국의 선교 단체들이 이슬람권 선교를 향한 새로운 훈련을 레바논에서 가질 수 있다. 레바논은 이슬람의 순니와 시아파, 알라위파 그리고 드루즈파 그리고 기독교(마론파 정교회, 로마카톨릭, 개신교 교회)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슬람권 선교 훈련을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레바논에 할 수 있다.(P.O.Box 90-984, Jdeidet el-Metn, Lebanon, 전화.+961-1-240533/4 , 팩스 + 961-1-240 436, cait@destination.com.lb )
4/ NEST(Near East School of Theology: 잔다르크 거리의 성공회,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루터교, 장로교 연합신학대, 학장: 메리 Mary Michael): NEST는 1932년에 세워졌는데 그때 베이루트에 있는 종교학교와 아테네(그리스)의 종교학교가 합병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동(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등의 지역을 일컬음)에서 복음주의 신학대학의 역사는 18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에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 목사가 베이루트에 첫 개신교 교회 신학대를 시작하였다. 1843년 신학대가 아베이Abey로 옮겨갔는데 이 일은 아랍어 성경 번역에 참여한 밴다이크(Cornelius Van Dyck)의 인솔하에 이뤄졌다. 이때는 신학과 일반 학문을 가르쳤다. 아베이 신학대가 성장하면서 시리아 프로테스탄트 대학(현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도 신학대 밖에서 시작하였다. 시리아 프로테스탄트 대학이 성장하자, 신학대는 신학교육만을 추구하고 시리아 프로테스탄트대학은 일반학문을 전담하게 되었다. 신학대는 그후 여러 곳으로 옮겨갔다가 1905년 베이루트로 돌아왔다.
1839년 터키에서 미국인 선교사 사이루스 함린(Cyrus Hamlin) 목사 지도하에 신학 교육이 이뤄졌는데 베벡, 나중에는 마르지푼, 마라쉬 그리고 하르푸트에서 신학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 하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사건이 터지자, 이들 신학교육이 중단되고 이를 통합하여 프레드 굿셀(Fred Goodsell) 목사가 이스탄불에 종교학교(School of Religion)를 세웠다. 1922년 이즈미르 대환란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생과 그리스인 학생들은 루트피 레보니안(Loutfi Levonian) 교수와 함께 아테네로 갔다. 1925년 이스탄불의 신학대 분교는 문을 닫고 아테네의 종교학교에 합류되었다.
1930년 근동의 선교사들이 이 지역의 신학교육을 강화하려고 아테네와 베이루트에 있는 신학기관들을 하나로 합치기로 제안하였다. 그해 봄, 시리아 선교회(장로교)와 근동선교회(회중교회)가 의논을 한 후 두 신학대가 합치기로 하고 1932년 베이루트에 NEST를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이 두 개의 미국 선교부 이외에 근동에 있는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1945)과 성공회 교회 예루살렘 주교 관구(1950년), 요르단의 루터 교회(1967)가 합류하였다. 1971년 신학대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옆으로 옮겨갔고 그후 레바논의 잦은 전쟁으로 신학대 학생수가 줄기도 하였지만 1991년 새로운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새롭게 발전의 기회를 찾고 있다. 2001년 현재 학생수는 40명으로 장로교, 성공회,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루터교의 교인들이 입학한다. 학교 건물에는 6층이 장로교 교회, 7층이 성공회 교회, 8층이 아르메니아교회가 있다. 이란과 불가리아, 아르메니아, 독일에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한다. 영어 토플 성적이 500이 되어야 입학이 가능하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레바논 신학대들이 무슬림 배경의 기독교 학생들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NEST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복음주의 교회를 위하여 세워진 초교파 프로테스탄트 신학대이다. 특히 성경과 이슬람학에 관심있는 학생이나 동방교회와 에큐메니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학교이다. 신학사(B.Th), 기독교 교육의 신학사, 목회학 석사( M.Div), 기독교 교육 석사(M.A.C.C), 목회학 석사 후 과정(S.T.M), 신학의 디플로마(학위과정이 아니고 신학에서 관심있는 분야) 과정이 있다. 그리고 맥코믹 신학대와 연장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NEST는 중동 신학대 협회(Association of Theological Institutes in the Middle East:ATIME)의 회원이고 중동 복음주의 교회 협의회(Fellowship of the Middle East Evangelical Churches: FMEEC)와 중동 교회 협의회(Middle East Council of Churches:MECC)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그러나 NEST를 제외한 나머지 세 신학대는 중동신학교육 협회(Middle East Association for Theological Education: MEATE)에 가입되어 있다. 레바논이 1943년에는 무슬림과 기독교가 50: 50이었으나 지금은 무슬림이 기독교인보다 더 많다. 콜린 채프먼 교수는 이슬람권 선교가 개신교 교회보다 로마카톨릭과 정교회측이 앞선다고 말한다. 개신교 교회가 이슬람권 선교에서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덧붙였다. 첫째 기독교인은 이슬람을 사탄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 복음을 전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실제적인 것만 원하지 이슬람을 연구하려는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에 대한 시야가 일천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슬람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좀더 큰 문제는 아예 접근할 생각을 안 한다. 넷째는 이슬람 사회 속에 소수로 살다보니 아예 체념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중동에서 살아 남아 있을 생각은 안하고 중동을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직장과 자녀 교육 등 경제적인 압박을 빼 놓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의 신학대에서 신학을 배운 학생들이 중동에 와서 자기의 전문 영역을 공부하는 것을 권한다. 아랍에서 신학을 공부하면, 아랍인을 이해하고 아랍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여 아랍교회에 목회자로서 섬기게 되는 장점도 있으나, 밑그림은 역시 한국의 신학적 토대 위에 그려지면 좋을 것이다. 레바논의 NEST는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대로서 도서관의 규모가 크고 정부에 성경연구를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P. O. Box 13-5780, Chouran, Beirut, Lebanon, 전화.+961-1-354194/346708,팩스+961(0)1-347129, nest.adm@inco.com.lb, nest.lib@inco.com.lb)
1) ‘아쓰디까이’라는 말은 ‘친구들’이라는 말이다. 퀘이커교인들을 중동에서는 ‘아쓰다까이’ 혹은 ‘프렌드즈’라고 부른다.
2) 1,800만 인구의 기독교가 15%인 200만이고, 이슬람의 순니파는 65-70%, 두르즈파는 7-10%, 알라위파는 10-15%, 쉬아파가 3%이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6
6강 이집트의 아랍교회
이집트에는 카이로 복음주의 신학대(Cairo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장로교)와 중동 복음주의 신학대(Middle East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가 있다. 카이로 복음주의 신학대학(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of Cairo, www.alexia.lis.uiuc.edu)은 1863년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아슈트에 자리하고 있다가 아베스라는 곳으로 옮겨갔고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가 가장 큰 장로교회가 있었던 아즈바키아(Azbakia)로 이사하였다. 1926년 외국선교부의 손에서 대학의 행정권을 이양받아 ‘나일 시노드(Synod of the Nile, 나일 대회)’ 산하에 현재의 압바시야(Abassiyah) 지역으로 옮겨졌다. 1871년 오로지 두명의 학생이 졸업하고 그 뒤 4-13명의 학생들이 졸업하였다. 1995-6년 학기에는 오전반과 오후반 모두 합쳐 17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 20명의 학생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에서 분교를 열었으나 1999년 12월 필자의 알렉산드리아 방문 때에는 학교가 문을 닫고 있었다. 카이로 복음주의 신학대는 대부분의 학생이 이집트인이고 수단학생들도 다니고 있었다. 1996년에는 전임교수가 8명, 그리고 15명의 시간강사가 가르쳤다. 교수진은 이집트인, 미국인, 한국인, 화란인들이고 아랍어, 영어로된 25,000권의 도서가 있고 4년제 신학사와 2년제 기독교 교육 디플로마를 주고 있다. 대부분 장로교인이지만, 성공회, 루터교, 하나님의 성회 등 여러 교단에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이집트 장로교회는 1860년부터 그 뒤 100년간 190개의 교회가 개척되었으나 1861-1985년까지 314개의 교회가 개척되고 1986-1996년까지는 318개의 교회가 늘어났다. 최근으로 가까이 올수록 교회 성장은 둔화되고 있다. 대형교단인 장로교단이외에 중형교단으로서 믿음(Faith) 교단은 1905년에 세워졌고, 1905-1960년 사이에 32개 교회가 개척되고, 1961-1985년 사이에는 19개, 1986-1996년 사이에는 25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리고 소형교단인 Grace교단은 1940년에 개척되어 1960년까지 5개의 교회가, 1961-1985년 사이에는 8개 교회가, 1986-1996년 사이에는 15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
이집트 교회의 성장에 영향을 준 상황적 요인으로는 새로 교회 개척하는 것을 규제하는 정부의 법, 빈곤한 경제 현실 그리고 정부와 국민들이 보여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제도적인 요인으로는 36-40%의 교회가 목회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복음주의 교회의 리더쉽 위기와 새로운 리더 개발을 위한 제한된 노력 등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 요인으로는 소그룹 원리와 교회 성장 신학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밖에, 선교적인 요인으로는 교회개척의 위기와 성장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싸미 한나 가브리엘은 지적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는 교인들의 현상유지에 급급하여, 전도열정이 식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선교 지향의 교회가 되려면 선교하는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인수가 증가하였다면 주로 콥트교인들이 복음주의 교회로 옮아갔다고 보는 견해와 이들을 개종자로 보는 견해로 나뉘는데 어찌되었든 무슬림에 대한 전도가 더욱 필요하다.
교단 |
시작 연도 |
교회 숫자 |
목사 |
교인의 수 |
||||
1960 1985 1996 |
1996 |
1960 1985 1996 |
||||||
장로교 |
1860 |
190 |
314 |
318 |
216 |
24,665 |
88,000 |
55,000 |
형제교단(닫힌 |
1880 |
160 |
150 |
194 |
21 |
9,600 |
9,000 |
10,700 |
하나님의 성회 |
1914 |
50 |
150 |
140 |
49 |
5,280 |
13,300 |
14,000 |
감리교 |
1902 |
42 |
95 |
100 |
80 |
3,800 |
7,000 |
10,500 |
오순절 |
1974 |
30 |
27 |
45 |
18 |
1,608 |
1,250 |
1,900 |
Faith교 |
1905 |
32 |
19 |
25 |
18 |
800 |
880 |
1,480 |
형제교단(열린 |
1915 |
43 |
36 |
22 |
7 |
1,700 |
1,450 |
1,000 |
그리스도 교 |
1948 |
12 |
15 |
19 |
19 |
1,200 |
1,500 |
1,200 |
은혜 사도 교 |
1935 |
6 |
12 |
17 |
9 |
316 |
605 |
550 |
기독교 표준 교 |
1919 |
10 |
13 |
15 |
14 |
500 |
800 |
1,100 |
Grace교 |
1940 |
5 |
8 |
15 |
10 |
150 |
240 |
700 |
하나님의 교회 |
1907 |
11 |
9 |
11 |
9 |
280 |
250 |
430 |
성공회 |
1847 |
24 |
20 |
10 |
11 |
1,434 |
1,200 |
850 |
복음 전도교 |
1960 |
1 |
10 |
10 |
7 |
70 |
3,250 |
3,000 |
침례교 |
1955 |
6 |
12 |
10 |
13 |
20 |
430 |
400 |
합계 |
623 |
891 |
952 |
501 |
53,389 |
131,150 |
104,806 |
|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7
7강 수단의 아랍-아프리카 교회
성경의 수단이라는 말은 30번 이상 나오는데 그 이름으로는 구스와 에디오피아가 있다. 이말들의 뜻은 혹독한 열로 인해서 갈색 피부 빛깔 또는 검은색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서 정확한 지리적인 위치를 알기는 어려우나 포괄적으로 보면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기도하여 동쪽으로는 소말리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모리타니아, 북쪽으로는 이집트까지를 이른다. 까이라완이라는 말과 니제르라는 말은 역시 negro(갈색)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볼 때 오늘날의 수단을 가리키는데, 성경에 제일 처음 나오는 수단의 언급은 모세의 구스 출신 부인을 예로 둘 수 있다 (민수기 12장 1절), 구스왕 디르하가가 등장하고 (이사야 37장 9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구스사람이 구해주었다(예레미야 37장 8절). 그리고 사무엘하 18장 21절에서 압살롬의 죽음을 고하는 사람은 구스 사람이었고 또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났다는 빌립 집사의 이야기가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한다. 이 내시는 간다게 여왕의 재무장관이었고 수단북부 마라위라는 도시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장관의 의해서 수단에 전해진 다음에 얼마나 크게 부흥했는가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3세기 이후의 많은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수단으로 피신하면서 수단에는 3개의 기독교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이 정복사업을 계속하면서 이집트에 있는 무슬림들과 수단의 누바에 살던 기독교인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져 600년부터 1200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갖는다. 그러나 이집트에 있던 이슬람 사람들은 이런 조약을 깨고 누바를 여러차례 공격하였고 기독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7세기말이 되면서 누바의 마지막왕 압둘라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되어 이때부터 수단은 이슬람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수단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수단 북부에서는 선교사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수단은 아프리카 부족이 살고있는 남부와 주로 무슬림들이 살고있는 북부로 크게 나뉘고 있다. 수단 북부에서 교회가 사라진 이후에 로마 카톨릭이 담당하였다. 이들이 처음 수단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기후와 질병 때문으로 46명이 죽었다. 1862년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죽자 선교활동을 중단했으나 새로운 가톨릭 선교회가 1873년 학교를 열고 농장을 시작하였다. 영국의 CMS 선교부가 들어오고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수단 내지선교회가 들어왔다. 장로교선교부는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였고, 가톨릭 로마 선교부는 백나일강의 서쪽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CMS는 남부지역을 택했고 수단 내지선교회는 나일강 북부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원 신학교를 세워 전도자들을 훈련했는데 그것은 1980년대 초에 말루뜨에서 였다. 그러나 그후 옴두르만으로 이 신학교가 옮겨졌다. 수단의 성공회는 1898년 6월에 선교사가 파송하기로 하고 1899년 과인목사와 함께 의사 하퍼가 카르툼에 도착하였다. 이때 성서공회에서 전시회도 가졌다. 성경번역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여러 수단 방언 (다리, 잔디, 모로, 마슐리, 뎅카, 누웨르, 쉴르크)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8개의 방언으로 번역되었고 신약은 17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지클리 기븐given과 그의 부인을 수단으로 파송했다. 그가 수단의 도착하였으나 카톨릭 선교부가 사역하는 곳에서는 사역할 수 없어서 남쪽으로 향했는데, 특히 돌렙이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많은 사역을 했으나 이 두 선교사는 현지 부족에 언어를 알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료 활동을 통해서 하게되었다. 그것은 당시 말라리아, 황열병 등 다양한 질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장로교 선교부는 현지 사역자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2개의 성서 학교를 시작했는데, 하나는 돌렙지역의 기븐 학교를 남쪽에 세워 영어로 가르쳤다. 또 다른 하나는 카르툼에 성서학교를 세웠는데 즈레이프 성서학교이다. 이곳에서는 아랍어로 가르쳤다. 그리고 평신도들과 지도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신학 연장 교육을 미국선교사들로 인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수단출신의 신자들과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왔고 누바출신이나 남부 출신들은 수단 북부에 정착 거류민들이 아니라는 핑계로 그들에게는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기회가 박탈당하고 있었다. 1987년에는 이집트 출신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남부와 누바산에서 온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였고 즈레이프 성서 학교 졸업자들도 더 늘었으나 그들이 교회 안에서의 역할은 큰 변동이 없었다. 1995년 총회장을 둘러싸고 수단남부 내에서도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여 두 개의 무리로 나뉘어졌는데 교회법에 따라 전 총회장이 임기를 그만두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존 죽슐 목사가 이끄는 그룹과 존까띨로 목사가 이끄는 다른 그룹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수단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수단 내전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다른 어려움이 있지만 1970년 중반에 시작된 로고스와 둘로스 사역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돕는 Operation Mercy, 청소년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YCF 와 고등학생들을 위한 기독 학생모임 그리고 대학생 기독인모임 focus 등의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수단의 교회들은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전통교회, 두 번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셋째로는 개혁 복음주의 교회등으로 나뉜다. 이들 대부분은 수단 교회 협의회의 속해있으나 아프리카 내지교회, 오순절교회, 순복음교회 등은 수단교회 현의회에 가입되지 않다. 카톨릭 교회는 수단에서 가장 큰 교회로 캄보니 학교등 미션 학교들을 세웠고 콥트 정교회는 수단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성공회는 주로 남부에서 성장했으나 수단내전에 결과로 지금은 수단 북부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고 장로교회는 성공회 다음으로 교회가 많고 수단 북부의 미션 스쿨과 두 개의 신학교가 있고 그 중에 하나는 수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를 가지고 있다. 수단 메시아교회는 누바지역에 있고, 수단 내지 교회는 메시아교회와 함께 주로 말루뜨에 있었으나 전쟁 내전으로 카르툼으로 옮겨왔다. 아프리카 내지교회는 주로 적도 지역에 교회들이 있었으나 토래트에 신학교를 세웠다. 오순절 교회는 아프리카 동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주바와 토래트에서 사역하였다. 형제교회는 1970년대에 사역이 시작하였고 순복음교회는 은사 운동을 주장하고 교회 입구에서 신발을 반드시 벗도록 하였다. 수단의 교회는 신학교에서 일할 교수들이 필요하고 이들 신학교 도서관에도 많은 신학도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북부에서 사역할 청년들을 위해 그리고 남부 수단에서 고통받는 수단 교회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아랍교회와 교회 개척 8
8강 팔레스타인의 아랍교회
구약의 블레셋은 아랍어로 “필리스티니윤(블레셋: 삼상 14:11)”이라고 한다. 이들은 해양민족으로 그 뿌리가 유럽에서 발원하여 기원전 13-12 세기에 지중해 해안에 정착하였다. 블레셋은 우상숭배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조상들 중의 하나가 필리스토이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지리적 명칭이 아니고 인종, 민족의 명칭이었다. 로마인들이 이 땅의 일부를 “팔레스티나”라고 부른 것이 오늘 palestine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랍인들이 이 팔레스티나 땅에 들어와 살면서 그 땅의 이름을 따서 필리스틴(팔레스타인)이라고 불러오게 되었고 이 말은 인종을 지칭하는 게 아니고 지리적 명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후 6-7세기경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쪽에 살았던 갓싼 부족들이 이주하여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는데 지중해 동부 해안에 자리를 잡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에 살았다. 그리고 7세기 이후 이슬람 정복으로 아라비아반도의 많은 부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그들 중의 상당수가 정치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세금-인두세를 내야 함), 사회적인 이유(혼인 등의 사유) 등으로 이슬람에 합류하여야 했다. 그러나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땅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20세기 후반에 세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정한 게임을 하지 못한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세계 언론, 유엔, 미국, 핵무기, 정보, 공군력, ABC/NBC/washington post 등의 언론 매체, 정치적 로비 등에서 팔레스타인을 능가하고 있다고 아랍인은 말한다.
현재 팔레스타인(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는 아랍기독교인과 아랍 무슬림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는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인이 살고 있다.
베들레헴 성서대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아니함)에 자리하고 있는 초교파 성경대학으로 64학점을 이수하면 학사학위(BA)가 주어진다. 베들레헴은 룻과 보아스의 낭만이 있었던 곳이고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대학은 1979년 아랍인에 의해 세워져 아랍어로 수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아랍어, 아랍문화, 아랍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베들레헴 성서대학은 지역사회를 위한 교사, 목회자, 구급처치, 여행가이드(영어로 수업)를 위한 교육도 실시한다. 1990년 헤브론의 가는 길목의 베들레헴으로 학교 건물이 옮겨졌다.(Bethlehem Bible College, Hebron Road, PO Box 127, Bethlehem, West Bank, via Israel, tel. 972-2-2741190, fax. 972-2-2743278, E-Mail now: Bethbc@planet.edu)
베들레헴 성서대학(Bethlehem Bible College)은 아랍 지역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필요를 도와줄 리더를 양성하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의 아랍교회(Arabic-speaking Church)의 부흥과 각성을 위해 힘쓴다. 둘째는, 미래에 중동을 떠날 가능성이 있는 아랍 청년들의 학술적, 신학적, 영적 성장과 진보를 통해 해외 이주를 사전에 막는다. 셋째, 지역 복음주의 교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학술회의, 세미나 등을 기획하고 지원하여 복음주의 활동을 진작시킨다. 넷째,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비그리스도인과 화해(아랍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를 도모한다. 다섯째, 정의와 인권,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복음을 적절히 관련시킨다.
베들레헴 성서대학은 1979년에 설립되었고 그동안 미국의 ‘해외선교부(Overseas Council International)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2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졸업생 중 50-60%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25%는 루터교회와 정교회에서 사역하고 있고 대다수는 기존의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침례교단과 하나님의 교회같은 소규모 교단에서 사역하는 졸업생도 있다. 그리고 5-6%만이 국내와 국외에서 새로운 교회 개척 사역을 하고 있는데, 뉴욕, 예루살렘, 벳잘라(Bet Jala) 벳사후르(Bet Sahour) 등이 이에 속하며, 최근 새로운 교회를 자밥다(Zababdeh)에 세우겠다고 발표되었으며 베들레헴에도 개척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졸업생들의 국가로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미국, 홀란드, 브라질, 레바논. 필리핀, 캐나다 학생들이었다.
무슬림세계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중동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대한 관심사이다. 베들레헴 성서대학은 기독교에 대한 무슬림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대학은 무슬림을 훈련시키는 몇 안되는 중동의 신학대이다. 새로 개설된 가이드 과정에는 몇 명의 무슬림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진리를 듣고 있다. 식량 원조와 의료 지원 사역 프로그램도 복음을 나누는 귀중한 수단이 되고 있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그들 삶에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드러내 놓고 있다. 2001년 등록한 정규학생은 38명이고 비정규 학생은 110명이다. 영어와 아랍어로 수업을 하고 현재 라말라Ramallah,하이파 Haifa, 롯 Lod 등에서 연장 교육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학사학위에 대한 4년제 학사 학위 인준을 2001년 1월 중동 신학교육 협의회(Middle East Association for Theological Education) 그리고 팔레스타인 교육성으로부터 완벽하게 인정을 받았고 앞으로 고등 교육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for Higher Education)의 인준도 받으려고 한다. 더구나 부전공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학사학위 과정에 설치된 부전공은 성서학 전공+기독교 교육 부전공, 기독교교육 전공의 성서학 부전공 등이다. 앞으로 연구가 진행될 부전공 과목은 상담학, 성서지리/고고학, 비즈니스, 음악, 커뮤니케이션, 사회사업 등이다. 그리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 쓸 기독교 과목에 대한 교과서(팔레스타인 당국이 허가한)를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성인들을 위한 평생학습 과정(Adult Learning program)을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파트타임 저녁반을 기획하고 있다. 과목은 아랍어 읽기와 쓰기반(arabic literacy), 구급과 인공호흡법, 제2언어로서의 아랍어반을 구상하고 있다. 도서는 35,000권이 있고 1/5이 아랍어로, 4/5가 영어로 되어 있다.
지금 팔레스타인은 인티파다(봉기) 속에서 정치, 안전,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가지고 교회도 이 고통과 함께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대치국면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그곳에서 사역할 선교사도 역시 요르단에서 아랍어 연수를 2년간 마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대인의 하나님 개념은 이슬람과 유사하다. 이 두 종교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 이슬람에도 예수님을 말씀(Kalimah)이라고 말하나 성경에서의 말씀(요한 1:1)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슬람에서는 ‘신의 명령’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성경은 삼위일체하나님의 본질을 부각시킨다. 아랍어로 하나님을 “알라”라고 이슬람과 아랍 기독교인들이 쓰지만 실제 이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